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배설에 대한 평가 ===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친 것은 다른 경우였다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이 경우에는 최고 지휘관과 지휘부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고, 전 병력이 사분 오열되어 각개 도주하는 상황이었기에 배설이 휘하 전선을 이끌고 퇴각한 것은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배설이 그나마 명량 해전 당시 12척이라도 투입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되려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기록된 명량 해전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 역시 수색 소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배설은 자기 휘하의 챙길 수 있는 전함은 최대한 온전하게 챙겨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량 해전 당시 참전한 판옥선의 소속이 제각각인 점이 그 근거이다. 즉 배설이 직접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외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함선은 최대한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복직한 이순신이 싸우러 나갈 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배설은 퇴각하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웠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벌하라는 유지를 갖고 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옳은 행동이었다. 퇴각시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물품(식량, 무기, 자재)을 폐기하는 기초적인 전술이다. 이후에도 이몽구가 멀쩡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연말에 전사한 걸 보면 처벌은 받았어도 참형과 같은 극형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선 아직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엄한 처벌을 주문한 듯하다.조정에서 탄핵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처형인지는 알 수 없다. 이몽구는 1605년에는 원무공신 2등에 추증, 복권되었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 때 배설의 함대만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고,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 때 최초로 응전한 장수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대첩에 참가 안 하고 탈영하면서 써버렸고[* [[임진왜란(김경진)|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났다고 묘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잡혀와 목이 잘렸다. 다만 이때의 배설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기에[* 현대로 치면 [[PTSD]]라 할 수 있는 증세들을 보였다. 실제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전쟁터에 오래 있다보면 걸릴 수 있어 마냥 겁쟁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 정황상 배설의 도망은 미묘하며 무조건 비난할 수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배설(조선)|배설]] 문서 참조.[* 물론 배설의 탈영자체는 도원수 [[권율]]이 격노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을정도이니 비판을 아예 피할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